엠팩
역사
The MPAK History
스티브
모리슨
(Stephen C. Morrison)
(김 철민 번역)
나는
14살 나이로 유타주의 숄트 레이크시 (Salt
Lake City) 에 사는 Morrison 가정의
일원이 되기 위해 한국을 떠난 이후로 가족 없이 한국에
남아있는 아이들의 얼굴을 잊은 적이 없습니다. Morrison 가정의
생활로 나의 생활은 매우 행복했지만 한국에 있는
친구들과 보육원에서 자라야 하는 수 없이 많은 어린이를
항상 기억했습니다. 우리 한국인들도
미국인들처럼 이런 어린이들을 입양하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한 것이 기억납니다.
나는 대학 졸업후
오레곤주 유진에 있는 Holt 국제
아동 복지회 에 가입했습니다.
Holt 에 관한 나의 지속적인 관심과 후원이 나를 Holt 에서 이사로 선출하였습니다. Holt 의 창설자인 Bertha Holt 씨와 함께 이사로 일할 수 있는 영광도 갖게 되었습니다. 어린 시절을 일산에서 지날 때, 이 Holt 씨를 "홀트 할머니" 라고 부르던 기억이 납니다. 물론 그의 남편 되는 Harry Holt 씨도 기억이 납니다. 그는 일산의 들에서 일하면서 나를 부르도져 (Bulldozer) 에 태워 주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내가 Holt 이사로 홀트 할머니의 옆에 앉아서 세계 각 곳에 흩어저있는 고아들을 위하여 돕는데 그들과 함께 있으니 어찌 이 일을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것은 마치 다 성장한 아들이 이제는 그 부모와 함께 사역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16년 동안 이사로 봉사며 이렇게 봉사 할 수 있는 기회를 참으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1989 에 Aerospace 연구소에서 위성 씨스팀 연구원으로 일하기를 시작했습니다. 이 회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의 LA 외곽에 있고 4000 여명 정도의 직원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몇몇 한국인을 만났는데 그 중에 김 철민이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한 큰 장로 교회의 장로이기에 그를 "김 장로님" 이라고 불렀습니다. 김 장로는 나보다 10살이나 많지만 나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졌기에 우리는 서로 좋은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는 매우 영적인 분입니다. 다행히도 그곳에 있는 한국인이 거의 다 크리스천 이었습니다. 그래서 점심을 하면 교회에서 일어난 일과 크리스천 토픽이 화제이었습니다.
김 장로는 내게 좋은 본보기가 되어 내가 보다 나은 크리스천이 되기를 격려해 준 열정적인 크리스천 이었습니다. 나는 자주 그의 사무실 가고 그도 나의 사무실을 찾아와 배우자를 찾는 것(나는 그 당시 미혼임)과 교회에 관한 토의를 비롯하여 거의 모든 내용의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는 미혼 혹은 기혼 부부를 위한 "크리스천 결혼 교실" 에서 가르쳤고, 또 일주일에 한번씩 어느 한인 기독교 방송에서 크리스천 결혼에 관한 프로그램을 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가끔씩 나의 입양의 경험과 부모님에 대한 말씀을 그에게 했습니다.
하루는 여전히 그에게 입양 경험을 그의 사무실에게 한 것으로 기억 납니다. 나의 간증을 들은 후 나를 바라보면서, "스티브, 내가 보기에 너는 한가지 부족한 것이 있어"라고 말하였습니다. 나는 그가 아내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줄 알았습니다. 뜻밖에 김 장로는 "너는 교회에 다니며 간증을 하면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전해야 될 것 같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그후 얼마간 이 대화를 잊어 버렸습니다. 나는 오레곤주 유진에 있는 Holt 이사회에 매년 참석한 것으로 기억이 납니다. 그때만 해도 이사로 봉사한지 벌써 10년이 넘었습니다. 그리고 나의 임기가 끝나기 전에 어떻게 하면 더 열심히 봉사 할 수 있을까에 생각하기를 시작했습니다. 바로 이즈음에 한국은 세계 제일에 고아 수출국이라는 수치를 피하기 위해 무척 노력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제 가난한 나라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이런 말을 듣는다는 것이 국가적인 부끄러움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이 많은 아이들이 외국에 입양되는 것을 줄이기 위해 자기의 가정을 열어 입양하려고는 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죄의식이 있는 딜레마가 있는 것입니다. 한국 아이들을 외국으로 입양 보내기를 원치 않으면서 직접 그들을 입양하려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입양에 대한 한국인의 인식이 좋지 않기 때문입니다.
1995년 초에 나는 김철민 장로의 사무실에서 LA 에 있는 한인 사회에 입양을 장려하는 것이 가능한지를 알아보고 있다고 허심 탄회하게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김 장로와 내 생각을 나누고 있을 때, 김 장로는 참 좋은 의견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즉시 나에게 매 주 하는 크리스천 결혼에 관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초대 손님으로 초청을 했습니다. 나는 "입양이 크리스천 결혼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 ?"고 물었던 것이 생각이 납니다. 그는 나에게 프로그램의 주제와 일치한다며 "그저 와서 마음에 있는 것을 나누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그 때에 아마도 김 장로께서 초대 손님이 없어서 프로그램의 주제와 상관이 없이 나를 부르는 모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바로 그때에 내 마음속에 번개같이 스치었습니다. 나는 "아! 그렇지 이것이 크리스천 결혼 라디오 프로그램이므로 나에게 진정한 크리스천 결혼 생활의 산 본보기를 보여 주신 우리 부모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 되지 않을까 ?" 그런데 "어떻게 나의 입양을 이야기하지 않고 나의 부모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가?" 하였습니다. 김 장로께서는 마치 바로 그것을 생각하고 있었다는 듯이 미소를 졌습니다.
1995년 3월에 우리는 한인 타운에 있는 미주 복음 방송에 도착하였습니다. 나는 김 장로와 윤정 아나운서와 함께 인터브를 하였습니다. 인터브는 30분 정도였습니다. 그들이 나의 부모와 입양 경험을 물었을 때에 나는 가슴 속 깊이의 말을 했습니다. 나의 부모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나에 대한 사랑을 말했습니다. 홀트 부부에 대해서도 이야기했습니다. 새로운 가정에서 성장한 것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자비와 은혜를 이야기 했습니다. 하나님은 입양의 경험 통하여 나에게 보여 주신 것입니다.
윤 정 아나운서가 거의 모든 질문을 했습니다. 나는 김 장로께서 아무 말을 안하고 매우 조용히 있는 것을 프로그램이 진행된 한참 후까지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상하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언뜻 그의 얼굴을 보니 눈물이 흐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극적인 이야기도 하지 않고 그저 조용하게 나의 경험을 이야기를 했는데도 불과하고 그의 마음을 움직인 것입니다. 시간이 충분하지 않아 다음 주에 하기로 했습니다.
이 인터브 후에 여기 저기에서 입양에 대해 알고 싶은 분들의 전화가 몰려 왔습니다. 그리고 김 장로와 나는 다시 점심을 나누면서 이제 한인 사회에도 입양을 권장하기 위한 프로그램을 생각해 볼 것을 이야기했습니다. 이 계획이 윤곽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결정한 것은 LA 지역의 한국 교회에서 초청 연사로는 Holt 창립자이신 홀트 할머니와 전 Holt 입양회의 회장이신 김형복 총재를 초청하기로 하였습니다. 김 장로께서는 나도 간증하라고 강조를 했습니다. 이 모든 일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주최 기관이 필요했습니다. 먼저 김 장로께서는 나를 LA에 있는 소리 선교회에 초대하여 남녀 회원에게 간증할 것을 부탁하였습니다.
이 선교회는 세계 여러 나라에 있는 한인 선교사를 지원하는 단체이며 김 장로는 당시 회장이었습니다. 이것이 처음 대중 앞에서 간증한 것이 되었습니다. 나의 간증의 목적은 나의 가슴에 있는 입양에 대한 간증을 통해서 그들의 마음이 움직여 이번의 큰 행사를 주최하기 바라는 것이었습니다. 간증후 모든 회원들이 한인 사회에 입양을 권장하는 것도 그들의 사명과 일치한다고 했습니다.
바로 이때쯤에 1995년 5월 31일 미주 한국일보의 2부 첫 페이지 전면에 대서 특필한 기사가 나왔습니다. 인공 위성 모델을 들고 있는 나의 사진과 미국에 온 첫 날 찍은 사진과 나의 부모와 함께 찍은 사진이 크게 실렸습니다. 이 기사는 박록 기자가 썼는데 아주 잘 썼습니다. 마치 그 분이 마음을 그 기사에 담은 것처럼 읽혀졌습니다. 그때부터 내게 너무나 많은 전화가 한국과 미국에서 왔고 특히 LA 지역에서 가장 많이 왔습니다. 우리가 행사를 하려는 날이 1995년 6월 15일 이기에 아주 적절할 때에 신문 기사가 나왔던 것입니다. 소리선교회 회원들이 내가 TV 에 나오도록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곧 "토요리포트" 라는 KTAN-TV 프로그램에 그 행사를 위해 15분 동안 출연했는데 "우주 항공 기술 세계의 입양자" 라고 소개되었습니다. KTAN-TV 기자들이 나의 직장에 와서 일하는 모습을 녹화했습니다. 그 당시 나는 6월 17일 행사를 홍보할 것을 알고 있는 소리 선교회 회원들의 지시를 따르느라 무척이나 바빴습니다.
그처럼
1995년 6월 17일,
"입양 간증의 밤" 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행사는 LA 에
있는 전 충신 장로 교회에서 하게 되었고 250명
정도
이 행사가 끝날 무렵 20여 가정이 입양에 대하여 알기를 원했습니다. 한 달에 25불씩을 어린이를 후원하는데 싸인 한 새로운 후원자 가 20여명이었으며, 수천 불의 기금이 모아졌습니다. 다음날 홀트 할머니와 김총재를 LA 공항에 모시고 가는 데 그들은 이 행사에 한 부분을 맡게 된 것에 대단히 기쁘다고 말을 했습니다. 아직도 나는 김 총재가 홀트에서 봉사하는 40년동안 늘 바라던 것은 언젠가는 한국 사회에 전하고 싶다고 한인들에게 말하던 것을 들은 기억이 나는데 마침내 바로 그날이 온 것입니다.
이 모든 경험들이 나와 또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벅차게 하였습니다. 매스메디아와 다른 채널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가정이 없는 어린이들의 필요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고 처음으로 많은 사람들이 "입양이라는 것이 우리 가정에서도 가능 한가 ?" 라는 질문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행사를 마친 후에 최 문 전도사님 부부는 내게 와서 "우리는 오늘 밤 입양을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이 행사가 이 부부만을 위하는 것만이라도 매우 가치 있는 일이었습니다. 이제 그들은 한국에서 한 남자 아이를 입양하고, 이 아이로 인해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다고 나에게 말했습니다. 지금 또 다른 어린이를 입양하려고 계획 중입니다. 그들의 꿈이 빨리 실현되기를 바랍니다. 이제, 더 많은 한국인이 그들과 같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후로부터 나는 LA 지역에 있는 많은 교회로 부터 간증 초청을 받기를 시작했고 펜실베니아 한 교회에서도 초청을 받았습니다. 나의 삶이 급속히 다른 진상으로 변화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드디어 나의 사명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나는 왜 하나님이 어렵고 힘들었던 어린 시절을 허락하셨고 또 아름다운 미국인 가정에 입양을 시키시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로 나를 성장시키시고 나의 가슴속에 늘 한국에 남아 있는 어린이들을 위한 마음속에 부담을 주시는지를 이제야 모든 것이 이해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왜 그러한 어린이들을 위한 마음의 특별한 부담을 주셨는지를 깨달았을 때, 비로소 나와 함께 같은 비전을 나눈 아름다운 아내 경미를 축복으로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1995년 12월에 결혼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새집도 축복해 주셨습니다. 우리 딸 헬렌이 1997년에 태어났습니다. 이제 내가 이제것 꿈꾸어 왔던 모든 것과 가정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즐거운 순간 중에 하나는 우리 부모님이 헬렌의 첫 돌 생일을 축하해 주기 위해 LA로 오셨을 때였습니다. 우리 딸을 그들의 무릎에 앉고 있는 모습을 볼 때에 이것이야말로 나의 꿈의 실현이었습니다.
2년후에 또 다시 "입양 간증의 밤" 을 가졌습니다. 이번에는 신우 세계 선교회 주최로 하게 되었습니다. 나의 친구인 김철민 장로가 후에 회장이 되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이 행사는 1997년 10월 4일 LA 근처 오렌지 카운티 제일장로 교회에서 열렸습니다. 이 교회는 지난번 교회 보다 훨씬 큰 교회인데 약 200명 정도 참석하였습니다. 초청 연사로는 홀트 할머니와 말리 (Molly) 홀트이었습니다. 말리 여사는 40년간 "일산 홀트 복지타운" 에서 핸드켑 고아들을 돌보고 있습니다. 이분은 오직 어린이들에게 전적으로 헌신하기 위해 전 생애를 독신으로 지내는 분이십니다. 우리 모든 사람의 가슴을 움직이는 그런 삶의 경험을 우리 모두에게 나누었습니다. 그분들 후에 나도 간증했습니다. 이번 행사의 목적은 지난번과 비슷했습니다. 첫째로, 한인 사회에 입양을 장려하고, 둘째는, 가정이 필요한 아이들과 입양아들에 대한 부정적인 관점을 바꾸는 것이고, 세 번째는, 일산 홀트 복지타운 에 있는 아이들이 필요한 것을 돕기 위한 모금이었습니다.
이번 두 번째의 행사를 통하여서는 입양에 대해서 더 알고 싶어하는 가정이 12가정이 나왔고 22명의 새로운 후원자와 일산 어린이 집을 위해 몇 천불에 이르는 모금이 마련되었습니다. 첫 번째 행사와 마찬가지로 이 번에도 이 행사를 통해 많은 사람이 가정이 필요한 아이들과 입양에 대한 생각이 바뀌고 또 많은 사람들이 입양 가능성을 생각해보는 도전을 받았다고 나는 확신합니다.
5년간에 이 두 행사를 거친 후 나는 한인들간에 한국 어린이들의 입양을 추천하는 그런 조직을 만들어야 되지 않는가를 많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 두 행사를 통해 한국의 가정이 필요한 아이들에 대한 특별한 관심과 열심을 가지는 많은 분들을 만나 알게 되었고 최근에는 북한에 있는 어린이까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1998년 크리스마스에 한국을 방문 할 때까지 나는 어떻게 이 조직을 만들어야 되는지를 몰랐습니다.
우리 가족은 한국에 사는 처가댁 식구들과 크리스마스를 지내기 위해 한국으로 여행했습니다. 나는 한국의 "사랑의 교회" 의 영어 목회부의 초청으로 세 번의 예배시간에 간증을 하였습니다. 하루에 세 번씩이나 간증하는 것은 처음이었는데, 나에게는 큰 경험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의 간증을 통해 도전을 받으리라 믿습니다. 그들은 나의 메시지에 감사하다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의 마음이 움직였다고 생각하며, 몇 부부들은 간증 시간 후에 내게 와서 앞으로 입양을 생각해 보겠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일산에 가서는 말리 여사가 봉사하며 살고 있는 일산 홀트 복지타운 에서 간증을 했습니다. 여태껏 내가 간증한 곳 보다 일산에서가 나에게는 가장 의미 있는 곳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곳에서 250명에 달하는 장애 어린이들과 그곳에서 일하는 분들에게 간증을 했습니다. 그곳에서 수고하시는 한민희 목사와도 만날 수 있었고 그 분이 나를 여러 교회에 소개를 시켜 주셨습니다. 한국에 있는 동안 9회에 걸쳐 간증을 하였습니다. 감기가 걸렸지만 하나님은 매번 나를 사용하셨습니다. 나는 일산 동중학교에 초청 받아 900명 학생 앞에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나의 일은 그들에게 나를 위해서 살기보다는 남을 봉사하며 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학교 교장 선생은 무척이나 학생들에 관심이 많은 분이었습니다. 나는 학생들이 참으로 좋은 교장 선생이라는 것을 알기 바랐습니다. 급히 부탁을 받아 별로 준비 할 시간이 없었기에 그들에게 이야기한 것은 도전적 경험 이었습니다.
일산 어린이 센터에서 간증한 것외에 또 하나의 기억에 남는 것은 서울에서 남쪽으로 세시간 정도 거리인 김천시 를 방문 한 것입니다. 그 고아원의 이름은 "임마누엘 보육원" 입니다. 원장은 김 정숙 원장님 이신데 나의 가족과 가깝게 지냅니다. 우리는 영아실을 보았는데, 많은 어린이가 있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6명내지 7명의 아기들이 들어 갈 수 있는 방에 약 15명의 아기들이 있었습니다. 아기 침대를 놀 자리가 없어 몇 아이들은 방바닥에 큰 이불을 깔아 놓고 그 위에 누워 있었습니다. 거기서 먹고 잔다는 것이었습니다. 김 원장의 말은 부모의 심한 경제 상태 때문에 아기들을 버린다고 합니다. 그리고 근래의 한국의 경제 하락 상태 때문에 많은 가정들이 타격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럴 때에 아이들이 가장 많이 타격을 입는 것 같았습니다. 이 아이들을 보면서 너무나도 가슴이 아팠습니다.
한국에서는 또 하나 알게 된 것은 한국 정부가 해외로 나가는 입양아 숫자를 줄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목표는 언젠가 외국으로 가는 입양아들을 완전히 없애고자 하는 것이랍니다. 나는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많은 한국인 가정이 외국으로 입양 되야 하는 것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는 어린이를 입양하려고 할 때만 가능합니다. 나는 이 정책 때문에 많은 아이들이 보육원에서 자라는 것이 아닐까 하는 염려도 해봅니다. 그렇다면 누가 그들을 도울 것입니까?
한국 정부가 한국인 입양을 장려하기 위한 어떤 다른 노력이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어쨌던 한국정부가 언젠가 어린이들을 외국으로 더 이상 입양시키지 않겠다는 정책이 있다는 것을 안 이상 나로서는 무엇인가를 해야한다는 큰 부담감이 나의 마음속에 있습니다. 지난 5년간에 교회와 여러 곳에서 많은 간증을 통해 나는 입양에 대해 어린이들과 부모들에게 동시에 입양은 아름답고 멋진 것이라고 이야기를 해 왔습니다. 한국 사람들이 가정이 없는 아이들을 향해 그들의 가정을 제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제야 말로 한국인들이 나의 가족만을 돌보는 묵은 생각은 떨처버리고 예수님의 사랑을 가지고 이런 어린이들에게 손을 뻗쳐 나갈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입양홍보회(Mission to Promote Adoption in Korea)" 는 이러한 목적을 가지고 한국에 있는 가정이 없는 어린이들의 소리가 되기 위해 만들어진 기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