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우 의 이야기

By: 김명순
(1998 9월 대한사회복지회 이화영아원을 통해 입양)

김명순 씨 가족
민우 (가운데)

지난 97, 막내가 대학을 진학하면서 집을 떠나게 되자 우리집엔 남편과 나, 이렇게 두사람만 남게 되었다. 큰 애 수진이는 신학교 졸업후 서울로 올라가 유치원 교사로 일하게 되었고 둘째 경석이는 대학을 다니다 군입대를 하였다. 막내인 애진이 마저 언니가 있는 교회 목사님의 배려로 언니와 함께 생활하면서 학교를 다닐 수 있게 되어 무엇보다 고마운 일이었다. 시간적인 여유가 생기면서 그간에 미루어 왔던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나주시청에 소속된 자원봉사 모임을 통해 이화영아원으로 세탁봉사를 다니는 일이었다.

오랜만에 영아원을 방문했다. 세탁을 마치고 원장님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영아원의 여러 사정을 들을 수 있었다. 특히 나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영아원에서 실시하고 있는 위탁가정 적응훈련이었다. 훈련대상아동은 영아원에서 잘 생활하고 있는 아이보다는 정서적인 문제가 있어 적응을 잘 못하는 아이를 더 우선적으로 보낸다고 했다. 원장님으로부터 그런 아동중의 하나인 남호라는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나주의 한 공원내 반공호에서 탯줄도 잘리지 않은 상태로 발견되었을 당시 아이는 상당히 좋지 않은 건상상태였고 병원에서 입원치료를 받았지만 퇴원 후에도 발육이나 영아원 생활에의 적응이 원만하지가 않았다고 한다. 저항력이 약해 영아원에서 남호 혼자만 뇌수막염을 앓으면서 의식을 잃고 사경을 헤매기도 했고 그 이후로도 다른 아이들과 달리 예민하고 사람들을 경계하며 범상치 않은 눈빛으로 사람들을 바라보며 친구들과도 잘 어울리지 못하는 아이라는 설명이었다. 아이에 대한 얘기를 듣고 난후 세탁봉사보다는 아이를 위탁하여 키우는 일이 절실하다고 생각하고 그 일을하기로 결정하였다.

처음 아이가 집으로 왔을 때 주위의 눈치를 살피며 소심하게 행동하였고 음식을탐하는 것 외에는 생각보다 잘 지내주었다. 처음엔 1주일을 함께 생활하다가 다시 아이를 영아원에 보냈는데, 눈에 선하고 자녀들도 아이를 매우 보고 싶어해서 4일만에 다시 아이를 집에 데리고 왔다. 그 때 빙긋이 웃던 아이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한달동안 같이 생활하면서 아이에게 깊은 정이 들었다. 점차적으로 아이는 활발해지고 가끔씩 집에 내려오는 아이들은 남호를 무척 예뻐해 주었다. 아이도 형과 누나를 잘 따랐으며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무척이나 활발하게 움직이며 전형적인 시골 머스마가 되어갔다.

이렇게 영아원과 우리집을 왔다갔다 하는 동안 당시 군복무 중이었던 아들은 자주 전화를 했다. 왜 아직도 아이를 호적에 올리진 않았느냐 물었고 아이를 집에서 기르자며 적극적인 태도를 보여왔다. 자녀들이 아이의 이름을 민우로 불렀다. 아이는 가끔씩 영아원 이야기가 나오면 가고 싶지 않다는 표현을 했고 영아원에서 부르던 이름(남호)과 집에서 사용하는 이름(민우)이 달라 영아원에 가면 친구들이 민우를남호라 부른다며 기억을 해냈다. 어쩌다 한번 영아원에 들러도 엄마의 품을 떠나지 않고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않으면서 혹시나 두고 갈까 하는 불안반응을 보여 더욱 이아이를 영아원으로 보내는 것이 쉽지 않았다. 교회에서도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잘지내고 엄마 아빠를 잘 따르자 아빠도 아이를 돌려보내는 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눈도 맞추지 않고 한쪽으로 삐딱하게 고개를 젖히고 있는 아이를 보면서 " 이아이는 사랑으로만 고칠수 있는 병을 앓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아이와 함께 생활하고 싶은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물론 내 힘으로 아동을 고칠 수있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다. 이 아이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하고 그 사랑만 이아이를 정상적인 아이로 돌아올 수 있게 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영아원측에 입양에 대해 언뜻 물어보았을 뿐 구체적인 것은 결정 할 수가 없었다. 먼저는 아빠 나이도 많고 IMF로 다니던 농공단지 일을 그만두게 된데다가 구정 무렵 갑작스럽게 복막염 수술까지 하게 되어 체력적으로 많이 약해져 있었다. 나 또한 몇 년 전 공장에서 오른손 손가락 3개가 절단되는 사고로 일을 그만둔 상태로 집안의 경제는 넉넉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과연 이 아이의 장래를 책임질 수 있을 것인지' 에 대한 염려가 '우리 가정이 꼭 이 아이에게 적절한 가정인가' 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했고 그래서 자녀들, 특히 아들의 의사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자녀들과 수차례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이들도 동생으로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신중히 생각하였다. 아빠 입장에서는 아동과 함께 생활하는 것은 크게 문제되지 않지만 자신이 아들이 없는 것도 아니며 가정형편도 넉넉치 않은 상황에서 입양을 한다는 것과 이 아이가 앞으로 건강하게 잘 성장해 줄 것인지에 대해 염려하였다. 우리와 생활하고 있는 1년여 동안은 다행히 건강하였지만 아이가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기게 염려되는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더 올바른 판단을 하기 위해 시간을 갖고 아동과 생활해 보기로 결정하였다. 입양에 대한 결정을 못 내리는 동안 영아원에서는 우리 가족들을 이해하고 기다려 주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영아원에서는 남호의 입양 양부모를 찾는 다는 것은 어렵다고 판단하고 아이의 나이가 있으니 유치원 교육도 해야 한다며 큰 아이들이 있는 육아시설로 전원을 해야 할 상황이라 했다. 그러나 아이가 새로운 환경에 잘 적응할수 있을 지에 대해 영아원 측에서는 염려를 크게 하였다. 우리 가정에서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같은 생각이었고 아이의 특성상 다른 곳에 가서 적응하는 것은 쉽지 않을것을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양심의 가책까지 느끼면서 아이를 부둥켜 안으며 많이 울었다. 처음부터 우리와 함께 생활하지 않았더라면 아이가 덜 힘들지 않았을까싶은 생각도 들었고 아이를 영아원으로 다시 보내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 등, 많은갈등과 고민을 한 후 내 자식을 만들자고 결정을 했다. 이렇게 아이와 생활한 지 1년이 훨씬 지난 다음에 남호는 우리식구 민우가 되었다.

이제 정식적으로 아이를 우리 가족으로 받아 들인지 벌써 8개월이 흘렀다. 결정하는 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했지만 결정한 후에는 마음이 홀가분하였으며, 생활에도 크게 변화는 없었다. 단지 아동이 없는 생활을 다시 상상할 수 없고 원래부터 이렇게 살아왔던 것 같은 자연스러움을 느낀다. 아직도 유치원에 보내면 아이는 친구들이 많은 유치원이 영아원으로 생각되는지 엄마를 떨어지며 불안해했다. 그래서 서울에 있는 큰 애가 내려와 유치원 교사로 집에서 직장생활을 하게 되었고 큰 애가 근무하는 유치원으로 보냈었는데 어느 정도 적응하는 것 같았다. 그럴즈음 누나가 잠깐 유치원을 비운 사이 아이는 불안한 마음이었는지 유치원을 뛰쳐나와 큰길로 달려가다가 교통사고를 당했다. 그런데 지금 기부스를 하고 병원에 누워 있는 아이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며 밝다. 엄마와 하루종일 있는 시간이 좋아서인지 아빠가 오면 엄마와 교대할 것을 알고 아빠를 못 오게 한다. 아빠는 섭섭하게 생각하기도 하지만 아이가 심리적으로 완전한 평정을 찾지 못한 것에 마음 아파하고 있다. 우리 민우는 차분히 앉아 무얼 배우는 것이 무척 어려운 아이였다. 그래도 틈틈히 아이에게 글을 가르쳤다. 말도 차츰 또렷이 하고 한번 가르쳐 준 것은 잘 기억한다.

나는 이 아이에게 무언가를 특별히 잘 해줄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이가 정상적으로 건강하게 잘 자라 준다면 우리는 그것으로 고마울 뿐이며 아이가 나중에 성인이 되어서 우리를 부모로 만난 것에 원망을 하지 않을 수만 있다면 하는 바램으로 오늘도 우리 아이와 부산한 아침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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